1883년경 부터 중국인들이 대한 제국에 들어 오게 되었다. 이주해온 화교 대다수는 산동성 사람들로서 산동성에서 의화단사건으로 산동 지역이 어지러운 잠시 피난차 한국으로 온 경우와 한국과의 교역등으로 이주해온 이들이 대다수 였다. 대다수의 중국인이 산동 출신이라서 인지 당랑권이 많이 전파 된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에 들어온 화교중 당랑권을 하시던 분들은 강화룡선생의 제자로 계셨던 기춘정 선생의제자분이 몇분 계셨다. 그중 화교 학교 선생님을 지내신 임품장 선생님, 그리고 부산의 성당관리자로 계셨던 강경방 선생님등이 계셨다.
임품장 선생님
제자로 이덕강(이선생은 신촌에서 태을관이라고 하여 현재도 운영중에 있다),곡가진,이자량,구옥봉,강원도의 곡만성,미국으로 이주한 손선덕(서대문 사일구 도서관 옆에서 도장과 중국 음식점을 함께 운영 하였다)등이다. 한국인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셨다는 후문과 그래서 인지 한국인 제자가 거의 없는것으로 안다. 임품장 선생님께서도 대한 극장옆에서 한성반점을 운영하셨다. 그후 연희동에 거주 하셨다. 그중 소신당 선생은 대만으로 이주 하셨고, 그외에 주홍회씨등이 있다. 그리고 본인에게 도움을 준 임문관 선생 이분 역시 현재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 하신다고 한다. 본인의 선생님역시 당랑권과 다른 무술을 함께 하셨는데 이분 역시 중국 음식점을 주 생업으로 하셨다.
강화룡 노사에 대하여 강화룡 노사는 산동성 내양현사람으로 양세향에게 칠성 당랑권을 배웠다. 그리고 그 기법을 고향 사람들에게만 전수 하였다. 그러던중에 민국초 팔괘장의 왕중경등과 팔보 당랑권을 제정 하였다. 제자로는 팔보 당랑권제자는 풍환의 정도이고 이곤산,조작후,기춘정등이 칠성 당랑권의 제자들이다. 풍환의 제자로는 위소당이 있다. 위선생은 우리나라에 사업차 들어 왔었으나 육이오 동란이 나자 곧 바로 대만으로 건너 갔다. 위소당 노사는 오파 태극권도 오감천 노사에게 지도 받았다고 한다.
1963년 화교무술인들이 모여 서울 명동 (과거 중국 대사관옆 소학교)에서 한국인들을 지도 하였다. 이때 함께 모이신 선생들이 노수전,임품장,강경방,두학제,여품삼선생들이신것으로 알고 있다. 이시점이 한국에 중국 무술이 퍼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외에 팔괘장을 하신 노수전 노사가 계신다. 이분은 산동성에서 성문 지기를 했다는 설과 지역 치안대를 했다는 설등이 분분 하다. 국민단 당원으로 일본군과 많은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우셔서 대만 국가 유공자로 되어 있으시다...
일찌기 장권등을 수련하신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장권 선생님이 어느 분이신지는 정확하지 않은것으로 안다. 한국에 오셔서는 학벌이 없어서 인지 그리 넉넉한 생활을 하시지는 못한것으로 안다. 여러 일을 하셨지만 ...... 노 선생님의 윗대로 강씨 형제등(성명 불상),장씨등 몇몇이 있었다고 한다. 노 선생께서는 이분들에게도 배우신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경오 선생님이라는 분에게 팔괘장을 전수 받으신것으로 안다.
이경오 선생님은 상당한 고수로 노조사님 역시 고수 셨는데 이 노사를 보시고 깜짝 놀라 가르침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과 서신등으로도 지도 받으셨다는 설도 있다. 그외에 인천 화교 학교 선생님이셨던 필서익 선생이 계신다. 이분은 중국에서 사고로 한국으로 피신해 오신것으로 안다. 이분은 무술에 고수로 알려져 있다. 노수전 노사님의 제자로 그분의 아드님 노수덕(현재 산동성에 거주 하신다고 함)선생님은 젊은 시절 킥복싱을 하셨다 후에 팔괘장을 하셨다고 함, 그외에 유순화(인천 차이나타운내 대창반점 운영)선생등이 있다. 유순화 선생은 뚜장력이 강력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외에 올림푸스 호텔 옆에서 도장을 운영 하시는 필서신 관장등이 현재 있다.
그외에 화교 무술 협회장이셨던 성운승 선생님, 이분은 18세 경 한국으로 아는 아저씨를 따라 왔다고 한다. 그후 지금의 프라쟈 호텔 뒤 취영루라고 하는 중국 물만두집을 운영 하셨다. 이 음식점이 워낙 잘되어 많은 부를 축적 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중풍으로 몸져 누웠다고 한다. 그후 강남으로 옯겨 자제들이 운영하였으나 운영의 실패로 현재 한국인의 손에 넘어 간것으로 안다. 성운승선생은 중국에서 무술을 배우신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배우신것으로 알고 있다. 북창동의 금문도를 운영 하셨던 여품삼,두학제선생등이 계셨다.
일화로화교선생들이 모여 청계천에 도장을 할때 아래층은 화랑도 도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어느 선생과 화랑도 사범이 싸움이 났는데 화랑도 사범의 발차기에 맞아 한 선생이 코피를 쏟게 되자 성질이 난 중국 선생이 목검을 휘두르며 싸움이 꽤 커져 갔었다고 한다. 그러자 신고 받고 경찰이 출동하여 겨우 무마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 여러 일화가 있지만 사이트 상으로는 공개하기에는 개인의 사생활 문제가 있어 더이상은 공개하지 않기로 하겠다.
대구의 북부 정류장앞에 상록수 반점이 있다. 현재는 잘 모르겠지만 그 주인이 바로 노수생씨로 꽤 알려진 무술가다. 운남성 곤명시의 강용초노사의 제자인사국정 노사 역시 한국에 채류 하셨던 것으로 안다. 사국정 노사는 통배권,강식팔괘장,형의권등 내가권의 고수로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로 현재는 그 자제인 사준걸 노사가 그뒤를 이어가고 있다.그리고 이제는 사가문파로 새로이 탄생 하였다.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무술가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본인은 알고 있다. 연희동의 당랑권 선생인 장선생 이분도 미국으로 이주 하셨다. 또 포천에 거주 하셨던 왕 선생등등..... 이렇듯이 한국을 거쳐 갔건 한국에 살던 이 선생님들의 덕으로 그나마 우리나라에 중국 무술이 존재하는것이 아닌지..... 한국에서 화교들에게 좀더 따뜻하게 해주었다면 더 많은 화교 무술인들이 한국에 정착하여 더 좋은 무술을 보급하지 않았을까? 중국에서는 무술을 우리 나라 처럼 도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어귀 공터에서 무술을 할줄 아는 선생들이 알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도장은 일본의 형태이고 도복 역시 일본의 영향으로 흰 도복과 빨간띠등은 일장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검도 역시 일본의 하까마 형태이고 면과 동은 요로이가부또 형태를 변형 한것이다.
그 당시에는 특별히 문파나 어떤 선생에게 배웠다는 전인증서 같은것은 없었을줄로 안다. 요사이 장사속으로 몇대 전인 하는것이지 그 당시에는 부자는 선생을 집으로 초빙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함께동네 어귀에서 맨손 체조 하듯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의 선생님도 이것 저것 여러 가지를 할줄 아셨던것 같다, 그러나 그중 제일 자신이 좋아하는것을 선택하여 주로 행한것으로 안다.
'무도의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무술이 한국에 유입된 역사적 배경 (0) | 2025.03.07 |
---|---|
태극권 일대 권사 장세충 (0) | 2022.01.31 |
함흉발배에 관한 자세 이야기 (0) | 2022.01.31 |
형의권 왕수금노사님은 이러셨다. (0) | 2022.01.31 |
팔괘장 내가권 강씨문중에 대한 이야기 (0) | 2022.01.31 |
최근댓글